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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의증
베트남참전 고엽제 '후유의증' 전우들만의 공간입니다.
아픈 현실과 제도 개선에관한 글을 올려 주십시오.
작성자 무관심
작성일 2011-07-03 (일) 21:35
추천: 0  조회: 2241       
IP: 115.xxx.39
전세계 고엽제 유해논쟁…한국은 나몰라라
 

한국인의 고엽제 피해가 국내신문에 처음 보도된 것은 1992년 2월이다.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끝난 지 17년 후의 일이다. 그동안 다른 참전국, 특히 미국과 베트남,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선 이미 70년대부터 고엽제 유해논쟁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전세계 고엽제 유해논쟁…한국은 나몰라라


한국은 조용했다. 전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철저한 보도 통제 탓이었다. '미국의 베트남 재향군인 에이전트오렌지 희생자회'가 78년 다우케미컬 등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고 강력한 항의데모를 벌인 일도 한국에선 해외토픽의 한 귀퉁이 정도에만 보도됐다.


고엽제 후유증 '대 잇는 괴질'
1999. 11. 22 [경향신문] 25면


국민의 눈 귀 입을 틀어막고 데모라면 몸서리를 친 유신정부에서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이들을 이역만리 전선에 보내 피 흘린 대가로 '경제개발 불쏘시개를 얻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이 베트남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걸 꺼렸다. 공산베트남을 피해자로, 미국을 가해자로 볼 수밖에 없는 고엽제문제 등 '참전의 과(過)'를 다루는 건 끔찍이 싫어했다. 그건 이후의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베트남 전투에 참여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더욱 그랬다. 자신들의 전공에 흠이 갈 게 두려웠는지, 아니면 미국 눈치를 봤는지, 공산국과의 전쟁에서 일어난 반인류적 일을 다루는 게 싫었는지 역시 고엽제 보도를 통제했다. 1단짜리 기사도 참지 못했다.

1984년 고엽제 제조사들이 에이전트 오렌지 희생자에게 1억 8천만 달러를 주기로 합의했을 때 한국 신문은 그 기사를 싣지 않았다.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참전한 전두환 대통령이나 맹호부대 대대장이었던 노태우 장관이 불편해 할 것을 미리 알고 정부가 보도통제 조치를 한 탓이 컸다.

 

86년 베트남전쟁이 낳은 기형쌍둥이, '베트와 도크'의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는 "그들이 고엽제 기형아라는 걸 홍보조정관들이 미처 몰랐던 탓에 보도가 가능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물론 그들의 그 후 상황은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일본에선 연일 큰 뉴스였지만 국내에선 1보만 있었을 뿐 나중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만 갔다.


월남 참전용사의 고엽제 후유증이 보도되자..

 

그러던 1992년. 그해는 노태우정부의 힘이 빠질 대로 빠져 각계의 민주화 확대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지던 때였다. 특히 3월 총선과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화 바람도 거세게 일고 있었다. 바로 그 2월13일, 경향신문은 사회면의 절반가량을 털어 '월남 참전용사 고엽제 후유증' 기사를 실었다.

베트남전 종전 후 17년, 한국군이 해외전쟁에 참여한 지 28년 만에 처음으로 참전 군인의 고엽제 피해를 정면으로 다룬 기사였다. '대한 파월유공전우회'를 취재하고 현재 앓고 있는 후유증 환자와 이미 숨진 참전용사 유족까지 만나 작성한 기사였다.


1970년 맹호부대 전투요원으로 참전했던 이모씨(당시 49세)는 하반신마비 증세를 보였다. 그는 "베트남전쟁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다리와 발의 살이 빠지고 뼈만 남은 채 점차 굳어져 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특히 "지난 20년 10여 군데 병원을 다니며 진찰을 받았지만 모두 병명을 알 수 없다는 말만 했다."며 울먹였다. 그는 "전쟁 당시 정글 지역의 매복과 수색정찰을 마치고 귀대할 때마다 얼굴 팔다리에 온통 물집이 생겨났었다."며 그게 미군이 대량 살포한 고엽제 때문이란 것을 나중 귀국 후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1991년 12월 서울 보훈병원에서 간암으로 사망한 이 모씨(사망당시 48세)의 부인은 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남편이 죽기 전 "온몸의 피부가 벗겨져 마치 왁스를 발라놓은 것처럼 반질반질했다."는 것이다. 또 이씨는 "서 있으면 하반신에 피가 몰려 어쩔 수 없이 계속 누워서 생활을 했으며 그것도 고엽제 후유증 중 하나"라고 말했다. 병원 주치의는 "환자가 독성 약물의 과다복용으로 인한 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베트남전에서 뿌린 에이전트 오렌지가 악성 피부반응과 간암을 유발한다는 학계 연구보고가 나와 있다."라고 설명했다.

월남 참전용사 고엽제 후유증
1992. 2. 13 [경향신문] 23면


고엽제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했던 군인들

 

기사가 나가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기사를 제보한 전우회 회장이 "현재 대충 파악한 에이전트 오렌지 후유증 환자가 38명에 이르며 실제로는 1천 명도 넘을 것"이라고 밝힌 데 따른 여파도 심각했다.


간암 등 후유증…월남전 고엽제
1992. 5. 28 [동아일보] 11면


그동안 갖가지 증상으로 고생하던 참전 군인들이 "혹시 내가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참전 전우회와 국방부 보훈처 등 정부 유관부처, 언론사에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피부병부터 암, 호흡기 질환부터 전신마비 증세까지 병을 앓으면서도 발병이유를 몰랐던 참전 군인들은 전화 도중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았다. 목소리도 높았고 그동안 정부가 배려하지 않은데 대한 불만도 높았다. 병도 병이지만 그동안 당한 설움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듯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참전군인 중 상당수는 고엽제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정확한 발병 원인을 몰라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항의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그들이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 국제매독 등 고약한 성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흔했다.


피부가 헐고 온몸이 짓무르거나 망가지는 증세가 무분별한 쾌락의 결과 생긴 것으로 오인되며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병도 심각해졌다. 아무리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항변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나마 동정하는 투로 얘기하는 경우가 "베트남 풍토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정도였다.
 
이것도 나중에 알려진 경우지만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후유증이 있다는 걸 인식하고 미국에선 제약회사가 합의금을 냈다는 사실을 안 것도 1991년에 불과했다. 그 자신 베트남전에 장교로 참전했던 한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가 동료에게 그 사실을 알려온 덕분이었다. 그때까지 국내 환자들은 "전쟁 중 뭔가 잘못돼 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짐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보상을 위한 정부 및 관계자들의 발빠른 움직임

 

정부가 철저하게 입을 막아놓은 사실이 느닷없이 터져 나오자 상황은 갑자기 급물살을 탔다.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의 움직임이 우선 빨라졌다. 보상을 받거나 상이등급을 새로 받기 위한 활동을 구체화 해나갔다. 정부도 빠르게 움직였다. 국방부와 보훈처는 상이등급 분류 신검을 새로 해 판정을 조정키로 했다가 5월 들어서는 아예 "피해자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 고엽제 후유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경우, 2세에게서도 후유증이 드러난 경우가 속속 밝혀졌다. 또 일부 환자는 국방부에 참전기록조차 비치돼있지 않은 경우가 드러나 말썽을 빚었다. 이로 인해 정부가 고엽제 피해보상에 미온적이 아니냐는 의문이 불거졌고 급기야 9월에는 전우회 회원들이 경부고속도로를 막고 항의시위를 벌이는 사태로까지 진전됐다.

고엽제 후유증 파월장병 신병비관 목매 자살
1992. 8. 1 [동아일보] 23면


그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김영삼 후보는 고엽제 특별법 제정을 골자로 하는 국가유공자 우대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고엽제 후유의증 검진에 관한 법률안이 입법 예고됐고 이듬해 2, 3월 법안과 시행령이 잇달아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엽제 후유증과 후유의증 판정을 둘러싼 피해자들의 항의와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DMZ에도 고엽제가 살포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끝나지 않은 전투 '고엽제 후유증'
1999. 9. 2 [동아일보] 21면


그리고 1999년. 이번에는 베트남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와 민통선에 고엽제를 살포한 사실이 주한미군 보고서를 통해 밝혀져 다시 한 번 충격을 주었다. 30년 만에 비밀 해제된 '식물 통제계획 68' 보고서는 "한국 육군이 68년 4~5월과 69년 5~7월에 걸쳐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해 에이전트 오렌지, 블루, 모뉴론 등 3종류의 고엽제 2만 1천 갤런(315드럼)을 경유 등과 섞어 2천2백만 평의 지역에 집중 살포했다"고 밝힌 것.

이는 DMZ일대의 우거진 수목 때문에 북한 간첩과 공비의 침투가 쉽다고 우려했던 주한미군이 67년 시험살포를 해본 뒤 실시한 것이었다. 살포에 앞서 한국 국방부는 68년 1월 전방 철책과 주요시설, 도로주변에 살초제를 사용키로 결정했으며 유엔사에 고엽제 4만 5천 갤런을 요청했다는 것.


이렇게 받은 고엽제는 미군의 지휘 아래 한국 사병이 주로 맡았고 가루로 된 모뉴론은 철모에 담아 손으로 뿌린 사실도 확인됐다. 당시 고엽제 살포작업에 투입됐던 박모씨는 "재래식 분무기를 쓰다 나중에는 그냥 철모에 담아 뿌렸다"면서 "풀베기 작업에 지쳐있던 한국군들은 고엽제를 '하늘이 내린 선물쯤으로 생각해 나무를 베고 직접 손으로 바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에게서도 호흡곤란 사지마비 악성종양 성기능 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 확인됐다. 결국 당시 군인과 피해지역의 민간인들에게도 고엽제 후유증 치료 등 지원이 불가피해졌다. 고엽제 후유의증 지원법은 2000년대에 들어와 "1964년 7월부터 73년 3월 사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투 또는 종군한 자와 67년 7월부터 70년 7월 사이 대한민국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서 군인 군무원으로 복무한 사람들"로까지 지원 대상을 넓혔다.

"철모에 고엽제 담아 맨손으로 뿌렸다"
1999. 11. 19 [동아일보] 29면


그리고 2011년. 이번에는 경북 칠곡 미군기지에 고엽제를 매립한 사실이 주한미군에 의해 폭로됐다. 50년 전 베트남의 전장과 한국 비무장지대에 뿌려진 고엽제와의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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